나와 술 이야기

생각 2019. 2. 24. 22:56

 술에 대한 내 첫 기억은 동네 슈퍼에서 시작한다. 작은 집 세네개를 지나치면 있던 작은 동네 슈퍼에서 어린 나는 소주 한병 담배 한갑을 사오라는 아버지 심부름을 수 없이 했다. 지금 같았으면 어린아이한테 술을 파는 슈퍼주인은 큰일이 났을텐데,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술에 대한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좋아하셨는데, 많이 취한 날이면 어김없이 어머니랑 싸움이 났었던 것 같다. 단칸방에서 네 가족이 같이 지내던 때라서, 그런 날마다 부부싸움 소리를 자는 척 들으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처음으로 술에 마신 (취한) 날은 고등학교 2학년 축제 날이다. 축제 마지막 날, 당시 동아리 부회장을 맡고 있던 친구 하나가 소주 두 짝을 구해왔다. 학교 근처 한강변 어딘가 풀밭위에 자리를 둥그렇게 잡고 않아서 술을 마셨다. 대부분이 본인 주량을 잘 모르고 마셨으니까 여기저기 토하고, 술주정을 부리는 놈들이 많았다. 나는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추태는 보이지 않았고, 그냥 기분이 좋았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길에 당시 우리집이 하던 식당에 들러서 어머니한테 술마셨다고 자랑을 했다. 아버지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20대는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 술 술 술, 주로 가까운 친구들과 반복적으로 술을 먹었다. 사실 술을 먹어도 활발해진다거나 기분 기복이 심하지 않아서, 술자리를 해도 모르는 사람과 금방 친해진다거나 그렇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술을 못 먹지는 않아서, 술자리를 빌미 삼아 만나는 횟수만으로, 자리를 오래 지키는 것 만으로 일정 모임 멤버에는 항상 포함이 됐다.

 

 회사를 입사하고, 술자리가 많이 줄었다. 회식을 많이 하지 않는 회사 문화때문이기도 하고 여자친구와 만나면서 친구들과의 약속자리가 많이 줄어 든 영향도 있다.


 시작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집에서 혼자 맥주를 먹기 시작했다. (매일 술 먹었던 유럽 배낭 여행 이후가 아니었을까?) 맥주 한 캔은 맥주 두캔이 되고, 만원 네캔 시대가 열리면서 네캔이 예사가 됐다. 물론 다음날은 좀 힘들지만 기분 좋게 잠에 들게 해둔다. 맥주를 먹다보니 배도 나오고, 식욕이 늘어나 살이 찌는것  같아서 이제 안주가 필요없는 위스키로 바꿔보려고 이번엔 위스키를 사왔다... 싱글몰트 글랜피딕 Reserve Cask 향이 달짝지근하면서 부드러워서 전에 먹던 꼬냑보다는 훨씬 잘 넘어가는 것 같다.


"술보다 술자리를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술 권하는 사회지만 술 자체를 좋아한다고 하면 좀 타락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일거다.

익명을 빌어 고백하자면 확실히 나는 술자리보다 술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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